[안산신문]사설-탕평책과 협치

2019. 2. 14. 09:13안산신문

탕평책과 협치


백과사전을 찾아 보면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이라는 글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 숙종이 탕평책을 처음 시행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환국이 자주 발생했다.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와중에서 왕위에 올라 당쟁의 폐단을 뼈저리게 겪은 영조는 1724년 즉위해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의 필요를 역설하는 교서(敎書)를 내려 탕평정책의 의지를 밝혔다.
1730년(영조6) 옹립에 공이 컸던 노론(老論)의 강경파 영수 민진원(閔鎭遠)과 소론(少論)의 거두 이광좌(李光佐)를 불러 양파의 화목을 권하는 한편 그의 시책에 호응하지 않는 호조참의(戶曹參議) 이병태(李秉泰), 설서(說書) 유최기(兪最基) 등을 파면했다. 또한 노론의 홍치중(洪致中)을 영의정, 소론의 조문명(趙文命)을 우의정에 임명함으로써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고 일반 유생(儒生)들의 당론에 관련된 상소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1742년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우는 등 당쟁의 해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에 의한 화해기운 조성에도 불구하고 뿌리깊은 당파의 대립은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남인(南人)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이를 취소하는 바람에 수십년 동안 과거의 응시를 거부했으며, 이인좌(李麟佐) 등 과격파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영조를 이은 정조도 탕평책을 계승해 그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하고 노론·소론뿐만 아니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서얼(庶孼)도 글 잘하는 사람을 등용했으며, 남인 출신을 영의정에 앉히는 등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써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탕평책은 이처럼 조선 후기 영·정조가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책이다.
협치(協治)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지역 사회에서 국제 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공공 조직의 업무를 관리하기 위해 정치·경제·행정적 권한을 행사하는 국정 관리 체계. 행정 서비스 공급 체계의 복합적 기능에 중점을 두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윤 시장은 지난해 취임을 앞두고 기자들과 시정 전반에 걸친 현안과 공약 등에 대한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었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앞으로 4년 동안 안산시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어 양 어깨가 무거워진다”면서 “나의 언행이 나의 얼굴이고 그림자임을 인식하고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하겠다”고 말한바 있다.
또한 윤 시장은 우려된 시정운영에 대해 “시민이 선출한 시장이, 시민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시민을 가장 우선으로 시정을 펼칠 것임을 공언했다.
그러나 7개월 남짓 시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윤 시장의 시민을 위한 시정에 걸림돌이 곳곳에 있는 듯 하다. 윤 시장은 시장선거에 나오기 전에도 시민을 우선시하고 시민을 위한 시정을 펼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사석에서 만나도 윤 시장의 목표는 늘 안산시가 잘 이끌어 가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 그러면서 지역 위주의 인사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본인이 호남 출신이지만 안산시 발전을 위해서는 특정지역 위주의 인사는 절대 금물이라고 말할 때 마다 격한 공감을 한 기억이 난다.
협치도 그렇다. 각각의 분야에서 열심히 제 역할을 하는 많은 시민들의 소리를 듣고 시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졌던 윤 시장의 다짐이 퇴색되지 말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